조선시대 팬데믹 '천연두'와 숙종의 지독한 악연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2.06.22. 14:10

수정일 2022.06.22. 15:07

조회 4,715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조선시대부터 감염병 역사를 볼 수 있었던 서울역사박물관 <다시 일상을 꿈꾸며> 기획전(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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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26) 숙종과 천연두의 악연

코로나19가 유행한 지도 벌써 2년 6개월을 넘어서고 있다. 그동안 우리 사회도 코로나19의 영향으로 많은 분야에서 변화가 이루어졌다. 조선시대에도 시기별로 다양한 전염병이 유행하였다. 15세기의 악병(惡病), 16세기의 온역(溫疫), 조선후기의 천연두(天然痘), 19세기의 콜레라가 대표적인 전염병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천연두를, 두창(痘瘡), 두진(痘疹), 창진(瘡疹), 완두창(剜豆瘡)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숙종, 왕비의 천연두로 거처를 옮기다

조선 왕실에서도 천연두의 유행을 피해갈 수가 없었다. 조선후기에 들어와 천연두는 더욱 기승을 부렸고, 가장 악연을 맺은 왕이 숙종(1661~1720, 재위 1674~1720)이다. 1678년(숙종 4) 9월 8일 『숙종실록』은 “그때 도성 아래에서 두창이 크게 번지니, 대신들이 아뢰기, ‘조사(朝士)들로 하여금 궁궐 중에 출입하는 자는 모두 피하게 하며, 정시(庭試:궁궐에서 치루는 시험)도 창덕궁의 인정전으로 옮겨 설치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두창을 앓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고 기록하여, 조정의 대신들이 천연두 유행에 대비하여, 왕이 거처하는 궁궐의 출입 금지, 과거 시험 장소의 변경 등을 요청하고 있음이 나타난다. 천연두는 한번 앓게 되면 면역이 생겨 병에 다시 걸리지 않는데, 숙종이 이때까지 천연두를 앓지 않아 왕에게 병이 옮겨질 것을 특히 우려하고 있음이 나타난다.  

다행히 숙종 자신은 천연두를 피했지만, 한 달 후인 1680년 10월 18일 왕비인 인경왕후가 두창에 걸렸다. “중궁(中宮)이 편찮은 징후가 있었는데, 증세가 두창 병환이었다. 그때 임금도 또한 아직 두창을 앓은 적이 없었으므로, 약방 도제조 김수항이 청대하여 임금이 다른 궁궐로 옮길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것을 허락하였다. …”고 하여, 인경왕후가 두창에 걸리자, 숙종이 다시 거처를 옮겼음이 나타난다. 다음날 숙종은 창경궁으로 갔다.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하면 가족을 우선적으로 격리시키는 모습이 조선 왕실에서도 보인다. 

두창 발병 후 8일 만인 10월 26일 인경왕후는 경덕궁에서 20세의 아린 나이에 승하했다. 숙종과의 사이에 자식은 없었다. 『숙종실록』은 “2경(二更:밤 10시)에 중궁(中宮)이 경덕궁(慶德宮, 현재이 경희궁)에서 승하하였다. 그때 두 대궐이 서로 통할 수가 없어서 영의정 김수항이 경덕궁의 흥화문 밖에 있었다. 비변사에서 글로 승정원에 보고하기를, ‘내전(內殿)의 증후가 어제 밤부터 기침으로 숨이 차서 헐떡거리고 힘이 없으니, 증세가 십분 위중합니다. 모름지기 이러한 뜻을 아뢰야 할 것입니다.’ 하니, 승정원에서 즉시 승전색(承傳色)을 불러서 장차 왕에게 아뢰려고 하였으나, 왕의 건강이 며칠 전부터 편치 못하고, 야간에 또 구토하는 증세가 있었기 때문에 즉시 고하여 알리지 못하고, 먼저 자전(慈殿:명성대비)에게 고하였다. …”고 하여, 숙종에게도 병환이 있어서, 인경왕후의 승하를 바로 알리지 못한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1680년 인경왕후의 승하로 다음 해인 1681년 숙종은 21세의 나이로, 15세의 신부 인현왕후를 계비로 맞이하였다. 사극에서 장희빈의 라이벌로 기억되는 인현왕후는 숙종의 정비가 아니라, 인경왕후의 천연두에 의한 승하로, 계비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천연두에 걸린 숙종과 명성대비의 승하

1680년 두창으로 왕비를 잃었던 숙종 자신도 두창의 저주를 피해갈 수가 없었다. 1683년(숙종 9) 10월 18일 『숙종실록』은 “임금이 몸이 좋지 않았으니, 곧 두질(痘疾)이었다.”고 하여 숙종이 두창에 걸린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숙종의 병세는 점차 심해졌다. 10월 27일에 숙종의 환후가 더욱 더욱 심하여지자, 여러 신하들이 상의하여 김석주(金錫胄)로 하여금 다시 나아가 진찰하게 하였다. 김석주가 평소 의술에 밝아 그를 보낸 것이다. 김석주는 맥도(脈度)를 진찰해 보고, 잇달아 소리를 내어 안부를 여쭈었고, 숙종은 베개에 기대어 혼미한 상태로 단지 턱만 끄덕일 뿐이었다. 10월 28일 시약청에서 입진(入診) 하였는데, 비로소 환후가 낮아졌고, 11월 1일에는 크게 회복되어 비로소 딱지가 떨어졌다. 

천연두는 처음 걸리면 열이 몹시 높고 사흘 만에 반점이 생긴다. 기창(起瘡:부스럼이 일어남), 관농(貫膿:고름이 흐름), 수두(收痘)를 지나, 낙가(落痂:딸지가 떨어짐)가 시작되기까지 대체로 12일 정도가 걸리는데, 숙종은 대체로 이러한 과정을 거치고 있다. 저절로 낙가되기 전에 가려움에 긁어서 떼면 곰보 자국이 생긴다. 

조선시대 관리들의 초상화 화첩인 『진신화상첩(縉紳畫像帖)』에는 22명의 관리 초상화 중 5명의 인물에서 마마 자국이 선명하게 보인다. 세계사의 인물 중에서는 괴테, 모차르트, 조지 워싱턴 등도 천연두를 앓았음이 나타난다. 천연두의 후유증으로 마마 자국이 난 사람에 대해 ‘얼굴이 얽었다’는 뜻으로, ‘박색(縛色)’이 실록의 기록에도 보인다. 『영조실록』에는, “대개 ‘박색’이란 우리 동방(東方) 풍속이 천연두 자국을 가리켜 얽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지난해 국립민속박물관에서 개최된 <역병, 일상> 특별전, 두창에 걸린 후 열리는 마마배송굿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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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은 천연두에서 잘 회복되었지만, 그 여파는 어머니 명성대비 승하로 이어졌다. 1683년 12월 5일 대비가 저승전(儲承殿)에서 승하하였는데, “임금이 두질(痘疾)을 앓았을 때, 무녀 막례가 술법(術法)을 가지고 궁중에 들어와 재앙을 물리치는 법을 행하였는데, 대비가 매일 차가운 샘물로 목욕할 것을 청하고, 궁인(宮人)들을 꾀어 재화(財貨)와 보물를 많이 취하였다.” 고 『숙종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숙종의 두질을 치료하기 위해 명성대비가 무당의 말을 믿고 찬 물에 목욕한 것이 승하의 주된 원인으로 작용을 했던 것이다.

숙종은 왕비와 자신뿐만 아니라, 아들인 경종과 영조도 천연두에 걸리는 아픔을 보았다. 1699년(숙종 25) 1월 14일의 『숙종실록』은 “왕세자가 두진(痘疹)을 앓았으므로, 의약청(醫藥廳)을 사옹원(司饔院)에 설치하였는데, 제조 등이 아울러 숙직하였다.”고 하여, 당시 왕세자로 있던 경종이 12세 때 천연두에 걸렸음을 기록하고 있다. 

다행히 12일 만인 1월 26일에 저절로 딱지가 떨어졌고, 의약청은 해산되었다. 숙종은 세자가 천연두를 무사히 극복한 것에 대해 감격하면서, 다음과 같은 하교를 내렸다. “공자(孔子)께서도, ‘부모는 오직 아들이 병들까 걱정한다.’고 하였는데, 부모가 자식에 대해 우연히 더위를 먹거나 감기에 걸려도 이를 걱정하면서 하지 않는 것이 없이 다 한다. 더구나 이제 세자가 치른 두창(痘瘡)이란 어떠한 환후(患候)인가? 주야로 애태우느라 침식도 달갑지 못했다. 다행히 신명(神明)이 은밀히 도와줌을 힘입어 이미 평온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으니, 부자간의 정의에 있어 그 기쁨 어찌 끝이 있겠는가?”라 하고, 왕실의 경사를 맞아 사면령을 내렸다. 

의금부와 형조의 죄수 가운데 강상(綱常)·장오(贓汚)·살인·강도(强盜)·저주(咀呪)를 제외하고, 잡범(雜犯)으로서 사죄(死罪) 이하는 담당 승지가 즉시 달려가서 일일이 석방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이어서 숙종은 세자의 두창 치료에 공을 세운 의관 유상(柳瑺)에게 품계를 올려줄 것을 지시하였다. 천연두와 같은 전염병의 극복은 조선 왕실의 안정에도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되었음을 실감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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