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에서 노량진까지' 한강 가로지르는 최초의 인도교

서해성 작가

발행일 2022.10.17. 13:00

수정일 2022.11.30. 17:57

조회 3,703

서해성 작가가 들려주는 '흐린 사진 속의 그때' (2) 한강다리와 신초리 마을
서해성 작가가 들려주는 흐린 사진 속의 그때
한강대교

그해 가을 함북 무산에서는 9월 초아흐레에 서리가 내렸다. 함남 장진 원동리 산골에 두 푼 두께 얼음이 언 것은 9월 20일이었다. 아직 추석(양력 9월 30일)은 열흘이나 남아 있었다. 그해는 사실상 가을이 없었다. 이른 서리와 두꺼운 얼음은 12월 세밑부터 이듬해 정초까지 가장 추운 겨울이 닥쳐오리란 걸 예고하고 있었다.

10월 3일 밤, 부녀자 둘을 유인하여 해삼위(블라디보스톡)로 밀항하려던 자들이 붙들렸다. 서린동과 팔판동에서 갓난아이 두 명을 대문 앞에 버렸다는 소문이 장안에 퍼진 건 10월 5일이었다. 안동 임현내면을 중심으로 활동해온 폭도(실제는 의병) 서른 살 권점룡이 조선인 형사 권녕직에게 체포되어 일제 경찰에게 취조를 받고 있었다. 류시영의 동지였다. 독립운동가나 의병을 잡으러 찾아다닌 건 대개 일본 순사 밑에서 일하는 조선인들이었다.

서울까지 거의 소식이 전해 오지 못했지만, 유난히 더웠던 7월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건설을 주창한 대동단결선언이 있었다. 아라사(러시아)에서는 짜르체제를 붕괴시킨 뒤 성립한 임시정부를 공격하기 위한 볼셰비키 활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쌀값은 이달 들어 두 해 전보다 두 배 정도 앙등했다.

1917년 가을, 강물을 타고 국토를 횡으로 이동하던 긴 역사가 세로로 바뀌는 순간

10월은 그렇게 오고 있었다. 그해는 1917년이다. 

일제에게 주권을 강탈당한 지 일곱 해째였고, 한국인의 일상까지 식민체제로 빠르게 편입되고 있었다. 몇몇 기록에서 보다시피 생활이 몹시 궁핍했는데, 날씨마저 가혹했다. 

그 세상을 가로지르면서 한강에 다리가 놓였다. 강물을 타고 국토를 횡으로 이동하던 긴 역사가 남북을 축으로 하여 세로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기차 철교는 이전에 개통(1900)했지만, 행인이 걸어서 강을 건너는 일은 처음이었다. 이는 한국인의 전통 공간 개념을 구조적으로 바꾸는 거의 사변에 가까운 변화였다.
그 세상을 가로지르면서 한강에 다리가 놓였다. 
강물을 타고 국토를 횡으로 이동하던 긴 역사가 
남북을 축으로 하여 세로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사진에 나오는 사람은 모두 한국인이다. 짐을 실은 소 두 마리를 앞세운 사람들이 한강다리를 건너고 있다. 교량 구조물과 소 그림자로 봐서 정오 직후다. 해가 약간 서쪽에서 비치고 있다. 강렬한 햇빛과 뒤에 보이는 숲으로 봐서 계절은 대략 늦봄에서 초가을 사이다.

용산에서 노들섬 방향으로 사진을 찍었는데, 왼쪽 멀리 관악산이 보인다. 소와 사람이 걷고 있는 폭은 4.5m고, 양켠 보도는 1.6m씩이다. 이 다리에 일제 총독부는 한강소교라고 이름을 붙였다. 노들섬에서 노량진을 잇는 다리 명칭은 한강교였다. 이 둘을 합쳐서 한강다리, 또는 한강인도교라고 불렀다. 한강소교 다리 끝까지 거리는 180m다. 경간(徑間) 60m로 3연수(連數)다. 커다란 쇠 난간(철골 트러스)이 3개라는 뜻이다.

일제는 서양 와사등(瓦斯燈) 분위기가 나는 전등을 다리 초입 양쪽에 세웠다. ‘와사’란 가스를 일본식 한자로 음차한 것이다. 등은 기둥마다 5개씩 부착했다.

옷차림으로 봐서 명백히 조선사람(한국인)들이 활개치듯 건너오고 있는 한강다리 초기 사진이다. 을축년(1925)에 큰물이 져서 부서진 다리를 다시 놓으면서, 지금 노들섬까지 노면 전차 궤도가 생긴 건 1929년이다. 거기서 노량진까지 전차길을 연장한 건 1936년이다. 따라서 이 사진은 1918년 이후 1924년 사이에 찍은 것이다.

사진에는 나오지 않고 있지만, 다리 들머리 양쪽에는 아까시나무를 한 그루씩 심었다. 19세기 말 한반도(인천)에 아까시나무를 처음 들여온 건 나중에 미쓰비시로 발전하는 일제 해운회사 일본우선이었다. 나무 한 그루마저 그저 심은 것만은 아니었을 게다.
‘문명화’한 한강다리로
나뭇짐을 실은 소를 끌고 지나가는 광경은 
식민통치 목적에 적절히 부합하는 앵글이었다.

사람들은 노량진에서 노들섬 자리를 지나 지금 막 용산 쪽에 당도하고 있는 참이다. 길마에 나무 바리를 싣고 있는 황소를 사내들이 끌고 있다.

앞 사내는 상투를 틀었는데, 고개를 외로 꺾어 동료에게 말이라도 건네는 듯하다. 두 번째 사내는 모자를 쓰고 있다. 필시 날이 더운 모양이다. 뒤에 오는 세 사람 중 하나도 모자를 썼다. 그네들도 소를 끌고 오는 듯한데, 사진이 흐려서 행동거지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다. 양쪽 인도에도 한국인 두 사람이 걷고 있다. 적어도 일행으로 보이는 사람은 다섯이다.

전차를 도입한 건 일제가 아니라 대한제국, 인도교를 구상한 것도 대한제국!

일제는 완공 전부터 한강다리를 널리 홍보했다. 인도교를 식민통치 초기 최고 치적으로 내세웠다. 조선 반도를 새 길로 연결하는 제1기 치도사업을 완수하는 일이었다. 1917년 10월 7일 오전 11시가 조금 넘어서 한강을 북쪽에서 남쪽으로 걸어서 처음 건넌 건 하세가와 총독 일행이었다. 이완용이 옆에서 동행했다. 다리 공사를 한 건 식민지 한반도에서 아예 국가기관처럼 관급 공사를 대놓고 맡았던 일제 토목회사 하자마구미(間組)였다. 그들이 쓰던 건물(경성지점)이 아직 용산역 건너편 쪽에 남아 있다.

그날 경성은 온통 잔치 분위기였다. 꽃으로 단장한 전차가 시내를 내달렸다. 정작 전차를 도입한 건 일제가 아니라 대한제국이었다(1899). 교토보다는 늦었지만 도쿄보다 삼년이나 빠른 운행이었다. 팔도를 누비는 도로를 닦겠다는 계획 또한 마찬가지였다. 제1기 치도사업은 총독부 기록을 살펴봐도 구한국(대한제국) 정부가 낸 길 1,200리를 기초로 한 것이었다.

한강에 처음 다리를 놓을 뜻을 세우고 비용을 준비하고, 당초부터 인도교를 구상한 것도 실은 대한제국 정부였다. 그러나 일제는 이를 묵혔다가 자신들이 미개한 조선에 베푸는 사업인 양 일을 진행하고 홍보했다.

그러므로 ‘문명화’한 한강다리로 나뭇짐을 실은 소를 끌고 지나가는 광경은 식민 통치 목적에 적절히 부합하는 앵글이었다. 식민지 시기는 물론 개화기 사진술 상당 부분은 이러한 의도가 거의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 이를 분별해내는 일은 단지 과거뿐 아니라 현재에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눈에 보이는 사실을 기록하는 장치인 사진술은 그 철저한 사실성 때문에 도리어 심각한 왜곡을 연출, 조작해내곤 한다.
일제는 총칼로 신초리 사람들을 몰아냈다. 
한강인도교가 생기면서 신초리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노들섬의 옛 이름은 새 풀이 돋는 동네 ‘신초리 마을’

한강소교가 끝나는 둔덕에는 제법 나무가 무성하다. 왼쪽 아래는 백사장이 보인다. 모래 언덕이 흘러내린 아래쪽에 다시 백사장이 나타나고 있다. 여름이면 물이 끼치기는 했지만 용산과 노들섬 사이는 실은 아직 강이 아니었다. 한강소교라는 건 다리라기보다 노들섬까지 모래밭을 건너서 한강교를 건너가기 위한 진입로에 가까운 것이었다.

용산에서 노들섬까지 모래밭 언저리는 오래도록 한국인들이 살아온 터전이었다. 동네 이름은 ‘신초리’(新草里)였다. 새 풀이 돋는 동네라는 뜻이다. 흰 모래 언덕에 풀이 돋으니 한양에서 봄이 가장 먼저 닿는 곳이었으리라. 적어도 숙종 연간부터 신초리 관련 기록이 나온다. 한강인도교는 정확하게 신초리에서 노량진으로 정조가 배다리를 놓았던 자리에 설치되었다. 신초리는 고양군 한지면이었다가 일제강점 뒤 경성부로 편입되었다. 일제는 용산에서 신초리 모래 언덕까지 한강소교를 놓은 뒤 다리 남쪽이 닿은 곳을 나까노시마(中之島)라고 했다. 나까노시마는 오사카를 흐르는 강에 있는 모래톱이다. 이 고유명사가 한국에 그대로 들어왔던 것이다. 광복 뒤에도 여전히 ‘중지도’(中之島)라고 부르던 지명이 ‘노들섬’으로 바뀐 건 나중 일이었다(1987).

신초리에 살던 사람들이 쫓겨난 건 1913년 이후다. 왕족으로 친일파가 되어 후작 작위를 받은 이해창신초리를 몰래 일본에 팔아 넘겼다. 오래 전 왕실에서 하사받은 땅이라고 했지만, 근거가 없는 주장이었다.

일제는 총칼로 신초리 사람들을 몰아냈다. 한강인도교가 생기면서 신초리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사진 속 일곱 사람 가운데 신초리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게다. 다리를 건너오면 일제가 만들고 있던 신도시 ‘용산’이었다.
일제에 의해 망실된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게으른 망각과 싸우는 일이다. 

한국 근대사에서 강제 추방과 철거의 기원은 어디일까?

이곳에 신초리라는 마을이 있었다는 내력을 필자가 찾아내 밝힌 게 한강다리가 생긴 지 100년 되던 해였다(2017). 이리저리 떠돌던 노들섬이 제자리에 돌아온 셈이었다.

이제라도 한강대교 들머리에 신초리 역사를 알리는 작은 푯말이라도 세웠으면 한다. 일제에 의해 망실된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게으른 망각과 싸우는 일이다. 시월이 가기 전에 한강다리를 걸어서 건너고자 한다.
노들섬과 한강대교(상단)
노들섬과 한강대교(상단)
매일 아침을 여는 서울 소식 - 내 손안에 서울 뉴스레터 구독 신청 내가 놓친 서울 소식이 있다면? - 뉴스레터 지난호 보러가기

댓글은 자유로운 의견 공유의 장이므로 서울시에 대한 신고, 제안, 건의 등
답변이나 개선이 필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전자민원 응답소 누리집을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상업성 광고, 저작권 침해, 저속한 표현, 특정인에 대한 비방, 명예훼손, 정치적 목적,
유사한 내용의 반복적 글, 개인정보 유출,그 밖에 공익을 저해하거나 운영 취지에 맞지
않는 댓글은 서울특별시 조례 및 개인정보보호법에 의해 통보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응답소 누리집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