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꿩 대신 닭'은 떡국에서 나온 속담? 서울의 새해맞이 풍경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4.01.03. 13:50

수정일 2024.02.20.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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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에서는 새해를 맞아 큰 잔치가 벌어졌고, 신하들은 축문과 함께 특산물을 바쳤다.
왕실에서는 새해를 맞아 큰 잔치가 벌어졌고, 신하들은 축문과 함께 특산물을 바쳤다.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62) 서울의 새해맞이

한 해를 시작하는 새해가 차지하는 의미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민간에서는 세배를 하고, 설빔을 입고 떡국을 먹으면서 한 해를 준비하였다. 왕실에서는 새해를 맞이하여 왕이 주관하는 큰 잔치가 벌어졌고, 신하들은 왕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축문과 함께 특산물들을 바쳤다. 왕은 신하들에게 지금의 연하장과 같은 세화(歲畵)라는 그림을 하사하였고, 새해를 축하하는 시를 지어 올리게 하였다. 

설렘 속에 맞이했던 새해

『조선왕조실록』이나 『일성록』과 같이 국가에서 편찬한 기록은 물론이고, 정조 때의 학자 홍석모(洪錫謨:1781~1857)가 한 해의 세시풍속을 정리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조선후기 실학자 유득공(柳得恭:1748~1807)의 『경도잡지(京都雜志』)와 같은 책에는 새해맞이 풍경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경도잡지』는 제목에서 보듯 서울에 관한 여러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 상권에는 의복·음식·주택·시화 등의 풍속을 19항으로 나누어 기술하고, 하권에서는 서울의 세시를 19항으로 분류하여 기록하고 있다. 
새해가 되면 아이들은 설빔으로 갈아입고, 어른들을 찾아가 세배를 드렸다.
새해가 되면 아이들은 설빔으로 갈아입고, 어른들을 찾아가 세배를 드렸다.
원래 떡국에 넣은 고기는 꿩고기였다.
꿩고기 구하기가 어려워지자 닭고기를 쓰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유래한 말이
‘꿩 대신 닭’이라는 말이다.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백성들은 새해 아침 일찍 제물을 사당에 진설하고, ‘정조다례(正朝茶禮)’라는 제사를 지냈다. 남녀 아이들은 ‘설빔(歲庇陰)’이라는 새 옷으로 갈아 입었다. 차례를 지낸 후에는 집안 어른들과 나이 많은 친척 어른들을 찾아가 새해 첫인사인 ‘세배(歲拜)’를 드렸다. 세배 때 음식을 대접하는 것을 세찬(歲饌)이라 하였고, 이때 내 주는 술을 세주(歲酒)라 하였다. 떡국은 한자로는 ‘탕병(湯餠:끓인 떡)’이라고 했는데, 전통시대에도 새해를 대표하는 음식이었다.

『경도잡지』에는 “멥쌀로 떡을 만들고, 굳어지면 돈처럼 얇게 가로로 썬 다음 물을 붓고 끓이다가 꿩고기, 훗추가루 등을 섞었다.”고 하여 19세기 서울의 떡국 모양과 재료를 기록하고 있다.

원래 떡국에 넣은 고기는 꿩고기였다. 고기 맛이 좋기도 했지만 꿩을 상서롭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점차 꿩고기 구하기가 어려워져서 닭고기를 쓰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유래한 말이 ‘꿩 대신 닭’이라는 말이다.
떡국은 한자로는 ‘탕병(湯餠)’이라고 했는데, 전통시대에도 새해를 대표하는 음식이다.
떡국은 한자로는 ‘탕병(湯餠)’이라고 했는데, 전통시대에도 새해를 대표하는 음식이다.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당시까지의 속담을 모은 책 『이담속찬(耳談續纂)』에, “꿩을 잡지 못했으면 닭으로 준비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새해에 친구나 젊은 사람을 만나면 올해는 ‘과거에 합격하시오’, ‘부디 승진하시오’, ‘아들을 낳으시오’, ‘재물을 많이 얻으시오’와 같은 덕담(德談)을 주고받았다. 초하룻날 첫새벽에 거리에 나가 맨 처음 들려오는 말소리로 그해 1년간의 길흉을 점쳤는데, 이것을 청참(廳讖)이라 하였다.

한 해의 운수를 점치는 풍습도 유행하였다. 조선시대 민간에서는 윷점오행점(五行占)이 유행했다. 오행점은 나무로 장기쪽 같이 만들어 금, 목, 수, 화, 토를 새겨 넣은 다음 나무가 엎어지는 상황을 보고 점괘를 얻었다. 윷점은 윷을 던져 새해의 길흉을 점쳤는데, 도가 세 번 나오면 ‘어린아이가 엄마를 만나는 운세’, ‘도도개’면 ‘쥐가 창고에 들어가는 운세’ 등으로 해석하였다.

그런데 요즈음 새해 운세를 보는 책으로 유행하고 있는 『토정비결(土亭秘訣)』에 관한 내용은 조선후기 세시풍속을 기록한 책들에서는 언급되지 않고 있다. 『토정비결』은 빨라야 19세기 후반부터 유행한 책일 것으로 짐작된다.

일기에 기록된 새해 풍경

16세기의 학자이자 관리 유희춘(柳希春:1513~1577)이 서울에서 관직 생활을 하면서 주로 쓴 『미암일기(眉巖日記)』에서도 새해의 모습들을 찾아볼 수가 있다. 1567년 10월 1일에서 시작하여 1577년 5월 13일까지 11년에 걸쳐 쓴 『미암일기』 1568년 1월 1일에는 “유협이 곶감 두 접과 건수어(乾水魚) 4마리, 참빗 10개를 나를 주었다. ... 나는 최인길에게 쌀 5두를 보내고 구비(舊婢)인 파치에게도 쌀 1두를 보냈다.”고 기록하여, 지인들과 서로 선물을 주고받은 모습이 나타난다.  

1571년 1월 1일에는 “닭이 울자마자 대소의 사람들이 와서 세배를 했는데 모두 기록할 수가 없다. 박해(朴海)가 소 한 다리와 떡을 보냈다.”고 하여, 세배하는 행렬이 줄을 이었음을 볼 수가 있다. 1월 3일의 “윤홍중이 새 달력 1건을 보내왔다.”는 기록에서는 새해에 달력을 선물하는 풍속은 예나 지금이나 같음이 나타난다.  

1576년의 1월 1일에는 “부인과 포(包)를 떼고 장기를 두었는데, 승부가 비등하였다.”고 하였는데, 부인과 장기를 둔 조선시대 관리에 대한 기본적인 이미지와 차이가 있어 흥미롭다.  

1577년 새해에 유희춘은 복을 맞기 위하여 문지방에 “상서로운 경치는 새해 첫날에서 비롯되고 즐거움은 1년 내내 많을 것이다.”하고, “풍년이 들어 한마을이 같이 즐거워하고 집안이 태평하여 우리 가족이 모두 기뻤으면 한다.”는 글귀를 걸어 두었다. 새해를 맞아 새로운 다짐과 포부를 밝히는 모습을 옛사람의 일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왕이 정사를 돌보는 집무실인 경복궁 장안당, 왕을 상징하는 <일월오봉도>가 용상 뒤에 있어 이곳이 왕의 공간임을 말해준다.
왕이 정사를 돌보는 집무실인 경복궁 장안당, 왕을 상징하는 <일월오봉도>가 용상 뒤에 있어 이곳이 왕의 공간임을 말해준다.

왕실의 새해맞이

새해가 되면 조선 왕실 사람들도 분주했다. 각종 의식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새해 첫날 왕실에서 행해지는 가장 큰 공식 행사는 정조(正朝) 의식, 요즈음으로 치면 신년 하례식이었다. 정조(음력 1월 1일)를 맞아 왕과 문무백관의 신하들이 한곳에 모여 신년을 축하하는 조하 의식을 행했다.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중심이 되어 관리들을 거느리고 왕께 새해의 문안을 드리고 새해를 축하하는 전문(箋文)과 표리(表裏:옷감의 겉과 속)를 올렸다.

지방의 관리들은 축하 전문과 함께 지방의 특산물을 올렸다. 왕은 신하들에게 회례연(會禮宴)을 베풀어 음식과 술, 꽃 등을 하사하면서 노고를 치하했다. 왕비의 거처인 중궁전에서도 왕실 여성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다.

왕실의 비서 기관인 승정원에서는 미리 선정한 시종신(侍從臣:왕을 가까이서 모시는 신하, 승정원,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예문관 소속의 관리)과 당하의 문관들로 하여금 연상시(延祥詩)라는 신년의 시를 지어 올리게 하였다. 당선된 시는 궁궐 안 전각 기둥이나 문설주에 붙여 많은 사람들이 보게 하였고 새해를 함께 축하하였다.
관리로서 80세, 백성으로서 90세가 되면 한 등급 올려주고,
100세가 되면 한 품계를 올려주었다.
새해를 맞아 장수한 노인들을 배려해 준 것이다.

조정의 관리나 왕실 및 관리의 부인 중에서 70세가 넘는 사람에게는 새해에 쌀, 생선, 소금 등을 하사하였다. 관리로서 80세거나, 백성으로서 90세가 되면 한 등급을 올려주고, 100세가 되면 한 품계를 올려주었다. 새해를 맞이하여 장수한 노인들을 특별히 배려해 준 것이다.

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리는 화원(畫員)들이 소속된 도화서에서는 수성(壽星:인간의 장수를 맡고 있다는 신) 및 선녀와 직일신장(直日神將:하루의 날을 담당한 신)의 그림을 그려 왕에게 올리고 또 서로 선물하기도 하였는데, 이를 세화(歲畵)라 하였다.

이외에 붉은 도포와 까만 사모를 쓴 화상을 그려서 궁궐의 대문에 붙이기도 하였고, 역귀와 악귀를 쫓는 그림이나 귀신의 머리를 그려 문설주에 붙이기도 하였다. 관청의 아전과 하인 및 군영의 장교와 나졸들은 종이를 접어 이름을 쓴 명함을 윗사람의 집을 찾아 옻칠한 쟁반에 올렸다. 이것을 세함(歲銜)이라 하였는데, 신년에 주고받는 명함이라는 뜻이다.
1791년(정조 15)은 정조는 선원전에 나가 인사를 올리고, 신하들에게 종묘와 경모궁에 나아가 예를 표할 것을 지시했다.
1791년(정조 15)은 정조는 선원전에 나가 인사를 올리고, 신하들에게 종묘와 경모궁에 나아가 예를 표할 것을 지시했다.

4일에 종묘와 경모궁(景慕宮:사도세자를 모신 사당)에 나아가 예를 표할 것을 지시하였다. 1791년(정조 15)은 정조가 40세 되던 해였다. 왕으로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할 나이의 새해 첫날 정조는 먼저 역대 왕의 어진(御眞:왕의 초상)을 봉안한 선원전(璿源殿)에 나아가 인사를 올렸다. 이어 예조 관리들의 인사를 받고, 4일에 종묘와 경모궁(景慕宮:사도세자를 모신 사당)에 나아가 예를 표할 것을 지시하였다. 정조는 나이가 많은 신하들에게는 특별히 새해 음식을 하사하였다.

“신하로서 나이가 70이 넘었고 내외가 해로하는 자가 자그마치 13명이나 된다. 이런 경사스러운 때를 맞아 기축(祈祝)하는 일로는 노인을 공경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고 하면서, 경로사상을 고취 시켰다.

새해를 맞아 팔도에 농사를 장려하는 윤음(綸音:왕이 백성이나 신하에게 내리는 글)을 내리기도 했다. “나는 백성이 하늘로 삼는 것을 소중히 여겨 ‘권농(勸農)’이란 두 글자를 앞에 닥친 많은 일 가운데 첫째가는 급선무로 삼으려고 한다.” 면서 농사를 권장하고 민생을 최우선으로 할 것을 선언하였다.

새해에 설빔을 입고 세배를 하며 선물을 주고받는 풍경은, 현재의 우리들의 모습과 매우 비슷했고 이것은 다양한 기록에서도 확인이 되었다. 전통시대 기록 속에 나타난 새해의 풍경과 의미를 기억하면서, 새로운 한 해로 들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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