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종 입맛 사로잡은 김치, 비결은 낙산 '홍덕이 밭'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2.03.16. 15:10

수정일 2022.03.24.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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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교수의 사심 가득한 역사이야기
낙산공원 전망대에서 바라보니 시원한 서울의 조망
낙산공원 전망대에서 바라보니 시원한 서울의 조망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20) 효종의 잠저와 홍덕이 밭

1. 효종의 잠저, 어의궁

조선의 17대 왕 효종(孝宗:1619~1659, 재위 1649~1659)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북벌(北伐)이다. 적장자 형인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후에 세자로 책봉되고, 인조의 승하 후에 왕이 된 효종은 북벌을 국시로 삼았다. 아버지가 당한 삼전도의 굴욕을 극복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시대 이념이었다. 서울 곳곳에는 효종을 기억하는 공간들이 산재해 있다. 

효종은 1619년 5월 22일 인조와 인열왕후의 2남으로, 향교동 인조의 잠저에서 태어났다. 인조의 잠저는 상어의궁(上於義宮)이라고 하였는데, 19세기 서울의 연혁과 관청, 풍속 등을 기록한 『한경지략(漢京識略)』에는 ‘어의궁’에 대하여, “상어의궁이라 한다. 인조의 잠저인데 잠룡(潛龍)이라는 이름의 연못이 있고, 용흥궁(龍興宮)은 동부 숭교방(崇敎坊)에 있는데 보통 하어의궁(下於義宮)이라 한다. 이 안에 있는 조양루(朝陽樓)는 효종의 잠저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후기에 오면, ‘어의궁’이라 하면, 대개 효종의 잠저인 ‘하어의궁(下於義宮)’을 지칭하였다. 어의궁은 ‘어의동본궁’으로도 칭해졌다. 어의궁은 조선후기 이후 별궁(別宮)으로 활용되었다. 별궁은 왕비로 간택된 신부가 미리 왕비 수업을 받던 곳으로, 오늘날의 결혼식에 해당하는 친영(親迎:왕이 친히 왕비를 맞이하러 감) 의식이 행해지는 날 별궁에서 궁궐로 이동하였다. 친영 의식으로 처음 왕비가 된 인물은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로 1517년(중종 12)에 거행된 이때의 친영 의식은 중국의 사신을 맞이하던 장소인 태평관(太平館)에서 거행되었다. 문정왕후와 인목왕후는 태평관에서 친영을 하고 왕비가 되었으며, 조선후기부터는 어의궁이 본격적으로 별궁으로 활용되었다. 

어의궁이 별궁으로 처음 활용된 것은 1638년 12월 인조와 계비 장렬왕후의 친영 때부터였다. 이것은 『숙종실록』 1680년(숙종 7) 3월 11일의 “가례(嘉禮:혼례) 친영 때의 처소는 어의동의 별궁에서 정하여 행하도록 하였다. 대개 고례(古例)에서는 반드시 태평관에서 행하였었는데, 무인년(1638년) 이후부터 수리하는 데 폐단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모두 (어의동) 별궁에서 거행하였다.”는 기록에서 확인된다. 이후 어의동 별궁에서의 친영을 하는 것은 관례가 되었다. 1681년 5월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 1759년 6월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 1851년 9월 철종과 철인왕후의 혼례식이 어의궁에서 거행되었다. 1759년(영조 35) 6월 22일 『영조실록』의 “임금이 어의궁(於義宮)에 나아가 친영례(親迎禮)를 거행하였다.”는 기록과, 영조와 정순왕후의 혼례식을 기록한 의궤인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 등에는 어의궁에서 친영 의식을 행한 모습이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영조정순왕후 가례도감의궤』 반차도. 어의궁 별궁에서 왕비 수업을 받던 정순왕후를 궁궐로 모셔오고 있다.
『영조정순왕후 가례도감의궤』 반차도. 어의궁 별궁에서 왕비 수업을 받던 정순왕후를 궁궐로 모셔오고 있다.

세자빈의 친영 의식도 어의궁에서 행해졌다. 1651년 12월 세자 현종과 세자빈(후의 명성왕후), 1671년 4월 세자 숙종과 세자빈(후의 인경왕후), 1696년 5월 세자 경종과 세자빈(후의 단의왕후), 1744년 1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후의 헌경왕후)의 친영도 어의궁에서 행해졌다. 효종의 잠저인 어의궁이 별궁으로 활용된 것은 이곳이 창덕궁, 창경궁 등의 궁궐과 거리상으로도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1863년 고종과 명성황후의 혼례식이 흥선대원군의 사저였던 운현궁에서 거행되면서, 어의궁 별궁 시대는 그 막을 내리게 된다. 어의궁이 위치했던 곳은 현재의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 위치한 효제초등학교 인근으로 보고 있다. 서울 지하철 4호선 혜화역 3번 출구 쪽에는 ‘어의궁 터’라는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다.

2. 효종과 홍덕이 밭

효종은 서울의 동쪽을 상징하는 낙산(駱山)과 특히 인연이 깊다. 잠저인 어의궁이 현재의 대학로 인근 낙산 자락이었고, 효종이 총애한 궁녀 홍덕(弘德)은 낙산 자락에 밭을 일구어 효종에게 김치를 올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동국여지비고』 한성부에는 ‘홍덕이 밭이라는 흥미로운 기록이 전한다. “나인(內人) 홍덕(弘德)이 병자란(丙子亂)에 포로가 되어 심양(瀋陽 봉천(奉川)에 들어갔는데, 김치를 잘 담가서 때때로 효종이 인질로 있는 집에 드렸다. 효종이 왕위에 오른 다음, 홍덕도 이어서 돌아왔는데, 다시 김치를 담가서 나인을 통하여 드렸다. 임금이 맛을 보고 이상히 여겨 그 출처를 물으니 나인이 사실대로 아뢰었다. 임금이 놀라고 신기하게 여겨 곧 홍덕을 불러들여서 후하게 상을 주려고 하니, 홍덕이 굳이 사양하면서 감히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임금이 이에 명하여 낙산 아래 밭 몇 경(頃)을 하사하여 그 수고를 갚아 주었다. 지금도 그 밭을 홍덕이 밭이라고 한다.”는 기록이다.
낙산공원 산책로 옆 홍덕이 밭
낙산공원 산책로 옆 홍덕이 밭

효종은 봉림대군의 신분으로 형 소현세자와 함께 1637년 2월 청나라에 인질로 갔다. 삼전도에서 맺은 정축화약의 조건 중 왕자를 인질로 심양에 데려간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효종이 청나라에 인질로 갔을 때 홍덕이라는 나인이 김치를 잘 담그어 효종에게 올렸고, 이 맛을 잊지 못한 효종이 왕이 된 후에도 홍덕이를 찾아 그 김치를 먹은 스토리이다. 홍덕이가 배추를 재배한 밭이 낙산공원 인근에 지금도 남아 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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