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이 옥새를 내주고 흥청망청 신조어를 만들어 낸 곳
STOCKZ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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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01 11:48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3) 단종이 옥새를 내준 곳, 경회루 경복궁에서도 가장 경치가 좋은 곳 경회루(慶會樓)는 정도전이 처음 경복궁을 완성할 때는 없었던 건물이었다. 경회루를 처음 세운 왕은 태종으로, 1412년 4월 2일 『태종실록』에는 경회루가 조성된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새로 큰 누각을 경복궁 서쪽 모퉁이에 지었다. 공조판서 박자청(朴子靑)에게 명하여 감독하게 하였는데, 제도(制度)가 굉장하고 창활(敞豁)하였다. 또 못을 파서 사방으로 둘렀다. 궁궐의 서북쪽에 본래 작은 누각이 있었는데, 태조가 창건한 것이었다. 왕이 협착하다고 하여 명하여 고쳐 지은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태종이 태조 때 세운 작은 누각을 고쳐 경회루를 건축했음을 알 수 있다. 1405년 개성에서 한양으로 다시 도읍을 옮긴 태종은 1411년 경복궁 안 서쪽에 연못을 판 후, 1412년 4월에는 『주역(周易)』의 36궁(宮)을 모방해 36칸에 46주(柱)의 돌기둥을 버텨 놓은 경회루를 완성하였다. ‘경사스럽게 만나는 누각’이라는 이름에서도 보이듯 군신(君臣)의 연회 및 외국 사신의 접대를 위한 목적이 컸다.태조가 경회루를 조성한 후 43년 뒤인 1455년 이곳에서는 슬픈 역사가 전개된다. 단종이 삼촌인 수양대군의 압박 속에 왕위를 양보했던 곳이 바로 경회루였다. 단종은 “내가 나이가 어리고 중외(中外)의 일을 알지 못하는 탓으로 간사한 무리들이 은밀히 발동하고 난을 도모하는 싹이 종식하지 않으니, 이제 대임(大任)을 영의정(수양대군)에게 전하여 주려고 한다.”고 하였고, 한확 등 군신들이 그 명을 거둘 것을 굳게 청하고 수양대군 또한 눈물을 흘리며 완강히 사양하였다. 그날의 모습을 『세조실록』의 기록에서 보자. 「“내가 전일부터 이미 이런 뜻이 있었거니와 이제 계책을 정하였으니 다시 고칠 수 없다. 속히 모든 일을 처리하도록 하라.”하였다. 한확 등 군신들이 합사(合辭)하여 전균이 다시 들어가 이러한 사실을 아뢰었다. 조금 있다가 전균이 다시 나와 전교를 선포하기를, ‘상서사(尙瑞司) 관원으로 하여금 대보(大寶)를 들여오라는 분부가 있다.’고 하니, 모든 대신들이 서로 돌아보며 얼굴빛을 변하였다. 또 명하여 재촉하니 동부승지 성삼문이 상서사에 나아가서 대보를 내다가 전균으로 하여금 경회루 아래로 받들고 가서 바치게 하였다. 노산군이 경회루 아래로 나와서 세조를 부르니, 세조가 달려 들어가고 승지(承旨)와 사관(史官)이 그 뒤를 따랐다. 노산군이 일어나 서니, 세조가 엎드려 울면서 굳게 사양하였다. 노산군이 손으로 대보를 잡아 세조에게 전해 주니, 세조가 더 사양하지 못하고 이를 받고는 오히려 엎드려 있으니, 노산군이 명하여 부축해 나가게 하였다. ... 세조가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는 백관을 거느리고 근정전 뜰로 나아가 선위(禪位)를 받았다.」 그런데 위의 기록에서 수양대군에게 옥새를 전해 준 인물이 성삼문(成三問:1418~1456)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성상문은 당시 동부승지(예방승지)로서 요즈음의 청와대 의전수석으로 재직하고 있었고 직무상 어쩔 수 없이 옥새를 꺼내온 것이었다. 수양대군은 단종이 내준 옥새를 받을 때 울며 사양하는 모습을 취했지만, 그의 진심은 아니었을 것이다. “세조가 선위를 받을 때에, 자기는 덕이 없다고 사양하니, 좌우에 따르는 신하들은 모두 실색하여 감히 한 마디도 내지 못하였다. 성삼문이 그때에 예방승지로서 옥새를 안고 목 놓아 통곡하니, 세조가 바야흐로 부복하여 겸양하는 태도를 취하다가 머리를 들어 빤히 쳐다보았다.”는 기록에서도 두 사람의 갈등이 심하였음을 볼 수가 있다. 1455년 윤 6월 단종이 왕위에서 물러난 날 성삼문은 크게 자책했고, 그의 절친 박팽년(朴彭年:1417~1456)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함께 경회루에서 뛰어내리자고 했다. 성삼문은 이를 말리면서 훗날을 도모하여 단종을 복위시키자는 다짐을 했다. “이날 박팽년이 경회루 못에 임하여 빠져 죽으려 하매, 성삼문이 기어이 말리며 말하기를, “지금 왕위는 비록 옮겨졌으나, 임금께서 아직 상왕으로 계시고, 우리들이 살아 있으니 아직은 일을 도모할 수 있다. 다시 도모하다가 이루지 못하면 그때 죽어도 늦지 않다.” 하매, 박팽년이 그 말을 따랐다.”는 『연려실기술』의 기록에서, 경회루 앞마당은 단종복위운동의 시발점이 된 공간이었음을 기억시켜 주고 있다.태종이 군신 간의 연회를 위한 장소로 세웠던 경회루에는 단종이 왕위를 빼앗긴 안타까운 사연이 있었으며, 연산군 시대에 이르러서는 흥청망청(興淸亡淸)의 공간으로 전락하였다. 전국에서 불러 모은 기생 흥청(興淸)과 함께 사치와 향락을 일삼은 왕의 모습을 경계한 언어, ‘흥청망청’은 현재까지도 전해지면서 역사의 준엄함을 보여주고 있다. 신병주 교수(건국대학교 사학과) 조선시대 연구 권위자이자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쓴 건국대학교 사학과 신병주 교수가 격주 수요일(발행일 기준)마다 전문칼럼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를 연재합니다.